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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의 이면(裏面)에는

자유인。 2022. 12. 26. 07:17

 

여든이 넘은 배우가 연극을 하고 연기를 하는 걸 보면 놀랄 때가 있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 많은 대사를 다 외울까, 라는 생각 때문이다.

디지털 문화가 가져다 준 긍정적인 측면 중 하나는 생활의 편리함을 들 수 있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몇 번 터치만 하면 무엇이든 금세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없을 때는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외워야 했다.

좋아하는 노래 가사 역시 모두 머릿속에 저장했다.

네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지리를 모두 눈으로 익혀야만 했다.

디지털 문화가 지배하면서 그럴 일이 없어졌다.

전화번호는 휴대폰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으니 누르기만 하면 된다.

노래 가사 역시 번호만 누르면 이내 확인이 가능하다.

지리 또한 처음 가는 낯선 동네라도 네비게이션 아가씨가 친절히 안내해 준다.

그 여파는 결국 기억하는 전화번호 하나 없고,

기억하는 노래 가사 하나 없고,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바보가 되는 인간을 만들어 버렸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에 따르면,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고 했다.

나의 걱정은 이러다 기억세포가 다 죽는 건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타를 배우면서 몸소 확인했다.

나는 독보(讀譜)를 할 수 없는 데다,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를 하려면 악보를 보면서 할 수는 없었다.

기타 코드를 일일이 다 외우는 수밖에는.

디지털 문화가 등장한 이래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던

나의 암기 능력을 20여 년 만에 재시험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신기하게도 다 죽은 줄 알았던 기억세포가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몇십 곡.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한동안 쓰지 않아 그 중 많은 부분을 또 잊어버리긴 했지만,

우리의 암기 기능은 나이가 들어도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