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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의 추억

자유인。 2023. 2. 12. 19:18

 

우리집은 체질적으로 술을 못 마신다. 선친이 그랬고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알콜 분해가 안 되는지 한 잔만 마셔도 이내 얼굴이 붉어지면서 취침 상태에 들어간다.

술에 관한 한 나 혼자만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술과 담배는 대개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많이들 배운다.

배운다기보다는 달리 놀이 문화를 배운 적 없는 젊은이들이 서로 모여 딱히 할 일도 없고

공부란 속박에서 해방된 기분에 그저 자기들끼리 어른 흉내를 내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평생 이어질 줄 그때는 모른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친구들과 만나 처음으로 술이란 걸 마셨다.

잘 안 맞았는지 마시고 나면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대학교 들어가서도 마지못해 마시기는 했지만 어쩌다 있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집의 유전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 건 군대에서였다.

내가 속한 부대는 야전훈련이 많았다.

통제가 심했던 영내(營內)와는 달리 영외에서는 밤이 되면 약간의 자유(?)가 있었다.

그럴 때면 선임병들은 후임들에게 민가에 내려가 술을

'추진(군대 용어로 '구해 온다'는 뜻)'해 오라는 지시를 종종 내렸다.

취침 전 분침호(분대 단위로 땅을 파서 잠을 청할 수 있는 참호)에서 지휘관의 눈을 피해 술을 마셨다.

안주는 생라면 부스러기. 개인의 선택이 아닌 '명령'이었다.

반합 뚜껑에 한가득 따르면 소주 반 병이 넘는 양이었다.

그 양으로 분대원들끼리 돌아가며 두세 순배를 마시고 나면 어질어질했지만

'군인 정신'으로 버텨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들어간 직장 선배들은 너무나도 술을 좋아했다.

그렇게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는 이들을 보지 못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나를 비롯한 후배들을 '끌고' 또 다른 일과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직장 문화가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한 번도 1차에서 끝나는 법이 없었다.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1차를 하고는, 2차로 맥주집, 스탠드바에서 3차를 찍고 나서야 하루 일과가 끝났다.

마치고 나면 새벽 2~3시. 잠시 귀가했다 출근하기 바빴다.

일을 하러 회사에 간다기보다 술을 마시기 위해 출근한다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뭐 이런 조직 문화가 있나 싶었다.

그때만 해도 술에 대한 내성이 갖춰지지 않은 나로서는 더없는 고역이었다.

그런 날들이 일 년쯤 이어지다 보니 몸에서 진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그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우리를 이끌고 종횡무진 술집을 누비던 선배 중 한 명은 술로

인한 불의의 사고로 젊디 젊은 나이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신혼의 부인과 어린 딸 하나를 남긴 채.

OOO 대리.

명문대 출신의 사람 좋은 선배였지만 술이 그를 버린 것이다.

요즘엔 잘 보기 힘든 포장마차 근처를 지날 때면 그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