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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날 때를 안다는 것

자유인。 2023. 11. 20. 04:48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을 보면 하숙집 주인의 딸이었던 아사코(朝子)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꼬마였을 때 처음 만나고, 대학생일 때 두 번째 만남까지만

해도 풋풋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그녀가, 세 번 째 만났을 때는 30대임에도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작가는 독백처럼 이야기한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우리 나라에 이름난 대중가수는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전설'이라 불릴 만한 가수는 그다지 흔치 않다.

그녀는 그런 '전설' 중의 한 명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더 이상 대중에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들려줄 자신이 없다며 그녀는 전격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드물게 들고 날 때를 아는 인물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은퇴 9년 만에 방송에 등장했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과 목소리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좀더 현역으로 활동해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 '다시 만난 그녀' : 2022. 12. 12 <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 그녀가 또 다시 대중 앞에 섰다.

미국 특집 방송에서 현지에 살고 있는 그녀를 초대한 것이다.

기대에 찬 마음으로 그녀의 무대를 응시했다.

이상했다. 그녀답지 않게 자꾸만 박자를 놓치고 있었다.

'전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아니 가수라면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모습이었다.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지 중간중간 건너뛰거나 얼버무리기까지 했다.

완벽을 추구하기로 소문난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일까.

한때 박수를 보냈던 그녀의 전격적인 은퇴 선언도 이번 무대로 인해 빛을 잃고 말았다.

아사코와의 만남처럼 그녀의 세 번째 무대 역시 없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