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
퇴직 후의 삶은
무료함과 허탈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고
그에 따라 제2 인생의 가치가 달라진다.
- 고혜련의 '힘내! 이제 다시 시작이야' 중에서 -
내 친구 중 한 명은 수년 전 공무원을 퇴직하고 또 다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경제적인 면으로만 보면 그는 현재의 수입뿐만 아니라 연금에다,
부인까지 일을 하고 있어 남부러울 것이 없다.
게다가 부동산을 통한 수입까지 더해져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에 비해 나는 평생 외벌이에다, 퇴직 후 수입 면에서도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종종 나의 삶을 부러워한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살 수 있느냐'며 비법을 좀 알려달라고도 한다.
그의 부러움이 무언지는 깊이 물어보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추측하건대 본인이 볼 때 나는 '나의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렇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평소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반대로 그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평생을 조직에 얽매여 살아왔음에도, 퇴직 후 그가 내키지는 않으면서 또다시 직장인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반면 나는 퇴직 후 남에게 얽매인 인생은 더 이상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금껏 해 온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은 그동안 못다 한 '나의 삶'을 사는 데 할애하겠노라고.
친구가 나의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생각으로만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타고난 천성과 성향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또한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누구의 삶이 더 옳고,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적 잣대로만 바라볼 문제는 결코 아니다. 사는 방식이 서로 다를 뿐이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보니 일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인생임을 얼마나
일찍 깨닫고 그에 대비하느냐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은퇴 후의 삶을 힘들어하고 있다.
오로지 일만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이들이 겪는 공통된 현상이다.
늦고 빠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은퇴 시점은 다가오게 마련이다.
일과 삶은 전혀 별개의 것임을 퇴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고는,
좀 더 일찍 준비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몰입할 대상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떠나는 순간까지 무료함을 어찌하지 못한 채 '하루가 감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가장 바람직한 건 현직에 있을 때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거듭하는 것이다.
우리와 달리 요즘의 젊은 세대는 이에 대한 훈련이 비교적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성장은 여럿이 있을 때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 시간을 잘 견디고 활용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