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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자유인。 2023. 3. 2. 22:08

 

세계 최초로 8,000미터 이상 고봉 16좌를 등정한 한 유명 산악인의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보았다.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설산을 목숨을 걸고

오르기까지의 애환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이룬 놀라운 성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이전에도 훌륭한 산악인은 많았다.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그들에게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지만,

새로운 일인자의 출현과 동시에 그들의 업적은 한순간에 묻히고 말았다.

방송을 보다가 문득 잊고 있던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역사는 언제나 1등만을 기억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최초'도 잊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에베레스트 등정에 처음 성공한 것은 1977년이었다.

제주 출신의 고상돈 대원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국가가 되었다.

18명으로 구성된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의 1차 공격조가 등정에 실패한 뒤,

고상돈 대원과 현지 셀파 두 명이 2차 공격조로 나섰다.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정상을 밟은 고상돈 대원이 무전으로 전한 일성은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였다고 한다.

국민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 이상으로 연일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그 열기를 이어가고자 에베레스트 등정팀의 전국 순회 전시회까지 열릴 정도였다.

당시 나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마침 학교에서 가까운 대구시민회관에서 기념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언론에서만 접하던 국민적인 스타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수업을 일찍 마친 어느 토요일 오후 친구들과 시민회관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등정팀이 원정 당시에 사용했던 각종 장비들이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입구에는 주인공인 고상돈 대원이 밤색 싱글 수트를 입은 채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의 친필 사인까지 받았다.

그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난생처음으로 대면한 최초의 유명 인사였다.

그러나 산악인의 운명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로부터 2년 뒤, 미국 알래스카로 또 다른 등정길에 나섰던 고상돈 대원은,

정상을 밟은 뒤 하산길에 맞닥뜨린 불의의 사고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불과 31세였다.

그 동안 내가 보관해 온 삶의 기록들은 많았다.

초등학교 통지표를 비롯해서, 친구들의 편지, 군대에서 받은 부모님의 편지,

취업 후 처음 받은 월급 봉투 등등... 그의 친필 사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들을 정리했지만, 그에게서 받은 사인만은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나서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살아 있었다면 70대 중반이 되었을 고상돈 대원.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시 한 번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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