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본문

내가 사는 동네에는 수령 200여 년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최근 어느 날 근처 식당을 가던 길에 우연히 발견하고는 반성과 놀라움이 교차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동네 주민으로 살면서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반성의 이유요, 새로 생긴 도심에 이렇게 오래된 나무가 당당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의 이유였다. 이름하여 '너와 나의 운명 느티나무'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설명문이 적혀 있다. '마을 정자목으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OO 신도시 조성에도 굳건하게 위치를 지킨 노거수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기 바란다'라고.

지자체 차원에서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한 것이 2023년 2월이니까, 그 이전까지는 특별한 관리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름을 짓고 난 후 비로소 주변 정리와 새 단장을 하고 나니 똑같은 나무인데도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신도시 조성 과정에서 이 나무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살리기로 한 것도 대단하지만, 뒤늦게나마 당국에서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공식적인 관리에 나서기로 결정한 건 더더욱 칭찬할 만하다.

지난해 한 이웃님 덕분에 알게 된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사례였다. 800년 동안 생명을 이어오고는 있었지만, 오랫동안 그저 시골 동네의 이름 없는 나무로만 방치되다가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기념물로 지정되고, 천연기념물로까지 승격되면서 정부 차원의 보호, 관리를 받게 된 것이다. 관리인의 설명에 따르면 이전까지만 해도 오랜 세월 부끄러울 정도로 방치가 되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고 안 닿고에 따라, 혹은 고유의 이름이 있고 없고에 따라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를 두 사례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에 관해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통해 그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비단 사물뿐이랴. 누군가를 만나 이름을 불러주는 건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호칭은 없이 상대방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며 곧바로 자신의 할 말만 이어가는 사람에게서 인간미나 친근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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