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날 본문

우리 사회는 나이에 매우 민감하다. 미국의 경우 스무 살 정도는 친구(friend)의 개념으로 생각해 서로 격의 없이 이름을 부르는 게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랬다간 큰일 난다.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나이에 따라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호칭을 일일이 익히자면 고충이 적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이가 들고 보니 가장 기분 좋은 말은 '젊어 보인다'는 말이다(설령 빈말일지언정).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심인지 단순한 인사치레인지는 본인 스스로 대충 안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보다는 훨씬 듣기 좋은 건 분명하다. 군대를 다녀온 20대 무렵만 해도 어른 대접받는 게 오히려 좋았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단골로 다니는 동네 빵집이 있다. 코로나 시기에 즈음해서 문을 열었는데, 입소문을 타고 몇 년 사이 나 같은 단골이 꽤 많이 생겼다. 빵 맛도 차별성이 있지만, 거기에 더해 남자 주인의 역할도 한몫한다는 생각이다. 과하지 않게 친절하면서도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신뢰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손주를 데리러 간다. 제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하루만이라도 퇴근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업무를 보라는 딸아이에 대한 친정 부모로서의 배려인 셈이다.
외손주는 그 가게에서 파는 빵을 무척 좋아한다. '모닝빵'이라고 하는 것인데, 하루 한 번만 만들기 때문에 일찍 가지 않으면 금세 다 팔리고 없다. 가서 허탕을 치고 온 적도 여러 번. 이날은 다행히도 몇 개가 남아 있어 가까스로 살 수가 있었다.
이따금씩 들르다 보니 주인도 내 얼굴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빵을 포장하고 있는 사이 '우리 손주가 이 빵을 좋아한다'라며 말을 건넸더니, 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진다. "손주라고요?? .. 손주가 있으세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내가 되물었다. "왜 그러세요?" 주인 왈. 여태까지 자신과 동년배인 줄만 알았단다. 그제야 그의 나이를 물어보니 나와는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나고 있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저절로 배가 부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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