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유년 시절의 추억 (13)
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5개 반까지 있었다. 한 반이 대략 6~70명씩 편성이 되었으니까 전교생을 다 합치면 무려 2,000명이 넘었다. 해마다 인구가 줄어 학교 유지조차 위태로운 요즘 환경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학교 행사 중 아이들의 가슴을 가장 설레게 한 것은 봄, 가을에 실시되는 소풍과 가을에 열리는 운동회였다. 학교에서 자주 가는 소풍 장소는 대략 2~3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도림사, 양촌 솔밭 등등 ..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우리의 교통 수단은 언제나 도보였다. 소풍 가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이면 아이스께끼, 달고나, 어묵, 도넛 등을 파는 먹거리 장수들이 학생들의 뒤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루곤 했다. 변변한 나들이 도구 하나 없던 아이들은 보자기로 소풍 가방..

어느 날인가부터 이전에는 없던 '국기 하기식'이란 행사가 열렸다. 게양식도 있긴 했지만 주로 하기식에 집중되었다. 아마도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 같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사람들은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문화도, 애국도 배가 불러야 살필 수 있는 일이기에 식구들의 호구지책 이외에는 감히 생각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란 캐치프레이즈를 대대적으로 내걸고 국민적인 계몽 활동을 시작했다. 그 일환이 국기 하기식이었던 셈이다. 당시 지방 어느 학교에서 국기를 게양하고 내릴 때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복창하는 것에 착안하여 정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때..

장학사들이 종종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교육청에서 정기적으로 학교 운영 실태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일정이 정해지면 학교는 그야말로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다. 며칠 전부터 대청소를 한다, 환경 정리를 한다, 정신이 없었다. 복도와 교실 바닥에는 초칠을 해서 반질반질하게 작업을 해야 했다. 바닥이 고르지 못한 까닭에 초칠을 하다 삐져 나온 나무 조각에 발바닥을 찔려 피가 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요즘 같으면 놀랐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사고는 사고로 치지도 않았다. 학교 살림을 관장하는 교감 선생님은 수시로 교실을 돌며 청소 상태를 점검했다. 낯선 분들이 오면 예의 바르게 꼬박꼬박 인사를 하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거센 폭풍이 지나고 장학사들이 학교를 ..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나는 선생님들에게 특별히 혼난 기억은 별로 없다. 크게 말썽을 피우는 성격이 아니었고, 공부를 아주 잘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뒤처지지 않을 정도? 그럼에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기억은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때 만났던 담임 선생님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세상과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어 학교가 거의 유일한 소통 공간이었다. 그러기에 학교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미래의 꿈을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셈이었다. 학교 핸드볼 팀 지도 교사이기도 했던 선생님은 아이들 입을 타고 '무섭다'는 소문이 퍼져 있던 분이었다. '야구 방망이로 아이들 이를 뿌러뜨렸다'는 등등. 단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내막을 몰랐던 그 분의 실체는 우리 반을 맡고 ..

형편이 어려운 집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쌀이 없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 책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학교 운영을 위해 매년 걷는 육성회비조차 못 내는 아이들.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라 한 해가 다르게 몸이 커졌지만 없는 형편에 새옷을 산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한겨울이 되어도 손목이 드러나고 발목이 드러날 정도로 짧아진 옷들을 그대로 입은 채 영하의 추위를 견디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매주 월요일 아침 운동장에서 열리는 전교생 조회 때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도중 이곳 저곳에서 쓰러지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그것이 영양부족에 따른 빈혈 때문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힘든 시절을 어찌 헤쳐 나왔을까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정기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