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본문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다.
기차로, 버스로, 혹은 자동차로 고향을 찾는 이들을 보며 나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어느 시점까지만 해도 나 또한 그 대열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농촌이다(위 사진 - 실제로 최근 내 고향 마을 전경이다).
고향을 떠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였다.
이후 취업을 하고, 결혼한 뒤에도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면 빠짐없이 고향에 내려갔다.
더러 가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른 때보다도 요즘 같은 명절이 특히 그랬다.
제대로 도로망이 구축되지 않았던 때라 왕복 2차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주차장이 따로 없었다.
편도 1차로뿐이어서 길이 막혀도 중간에 달리 빠질 수가 없었다.
오늘날 2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무려 13시간이 걸려 도착한 적도 있었다.
비행기를 타면 거의 인천에서 미국 동부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징글징글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같았으면 도중에 돌아왔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 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려가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연휴 기간이 길면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첫날에 곧장 내려갔다.
명절도 명절이지만, 사람이 귀한 농촌에는 일손 하나가 목말랐던 시절이었다.
명절은 부차적이고, 노동력 지원이 우선순위였는지도 모른다.
직장에서 사무만 보던 사람이 모처럼 고된 농사일을 하니 육체적으로 말할 수 없이 고달팠다.
그렇다고 그런 날이 일상인 부모님 앞에서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일은 종일 끊임없이 이어졌다. 농촌 일이란 시작만 있을 뿐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일이, 다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에 관한 주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명절이 와도 살인적인 교통 정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나처럼 농사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 고향은 왜 굳이 시골이어야만 했을까 원망도 없지 않았다.
세월은 더 흘러 부모님은 모두 떠나셨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더 이상
고향에 내려갈 일도, 명절 귀성 정체에 시달릴 일도 없어졌다. 한때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서울 사람들의 여유로운 명절을 나 스스로도 매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고 보니 마냥 좋기만 할 것 같았던 그들의 마음을 비로소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명절에 어디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다는 사실도.
이처럼 세상엔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머리로만 아는 얇은 지식으로 그렇다, 아니다를 함부로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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