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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밥집 메뉴판 본문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시간과 장소는 늘 나에게 일임하는 터라 내 마음 가는 대로 정하곤 하는데, 상대방 입장에서는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걸 내가 대신 알아서 해준다며 도리어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삶 자체를 여행의 일환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 밥 한 그릇을 먹더라도 어느 한곳을 고집하기보다는 안 가 본 곳을 위주로 하나라도 더 새로운 경험을 쌓고자 하는 편이다.

이번에 만나기로 한 장소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 위치한 삼각지. 바로 인근에는 한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통령실이 있는 곳이자, 오랫동안 미군 부대가 있던 지역이다. 또한 오래전 가수 배호가 부른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노래로 대변되는 곳이기도 하다. 삼각지역에 내리니 그의 팬들이 마련했다는 고인의 모습이 역사 한편에서 오가는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떠난 지 벌써 50년(1971년 작고)이 훨씬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그를 그리워하는 팬클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나를 비롯한 일반인들은 떠나고 나면 이내 잊히고 말지만, 가수는 그가 부른 노래로 언제까지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남다른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은 부대 주둔에 따른 건축 규제로 다른 곳에 비해 발전이 더딘 편이다. 그런 이유로 노포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중에서도 대구탕이 특히 유명하다. 어느 집이 '원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한 곳이 성업을 하면서 제2, 제3의 업소들이 뒤이어 생겨난 게 아닐까 싶다.

이날 찾은 곳은 '삼각지국밥'이라고 하는 국밥 전문점이었다. 최근 이곳을 다녀간 신세계그룹 회장이 SNS를 통해 극찬을 했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노포가 대세를 이루는 전반적인 동네 분위기와는 달리 실내 환경 등에서 한결 세련되고 현대화된 느낌이라는 것이 내가 이 집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였다.

블로거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는 그때그때 필요한 사진을 때맞춰 찍는 것인데, 더러 사진을 찍기가 애매하거나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는 대개 마주 앉은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날도 그런 편이었는데 주인공인 국밥 사진을 놓치고 말았으니 글을 전개하기가 영 매끄럽지 못하다. 그건 일단 다음 사진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사진에 보이는 음식은 반주용으로 시킨 냉제육(12,000원)인데, 가성비가 괜찮았다. 제육에다 새우젓과 파, 고추를 함께 얹어 먹으면 이만한 안주가 없다. 플레이팅도, 맛도 만족스러웠다.

국밥 사진이 없으니 메뉴판을 보면서 설명하는 수밖에. 주로 많이들 먹는 게 해개장(맵고)과 달개장(덜 맵고)인데 이름 그대로 국밥이다. 토렴식(국에 밥을 말아서 나오는 형태)으로 나오는데, 신세계 정 회장의 공개적인 극찬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평소 음식에 관해 가타부타 말이 없는 지인조차 이날만은 이례적으로 '괜찮다'는 평가를 내릴 만큼. 나 역시 국밥에 관한 한 새로운 '맛집'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누가 나더러 삼각지의 대세를 이루는 대구탕과 이 집의 국밥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묻는다면 나는 단연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나의 취향은 다 먹지도 못하는 반찬이 지나치게 많이 깔리는 우리네 전통 상차림보다는 필요한 음식만 올라오는 단출한 서양식 상차림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앞선 제목(어느 국밥집 메뉴판)에서 암시했듯이, 이 집의 국밥이 맛있긴 하지만, 그건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부차적인 소재일 뿐이다. 핵심은 여느 음식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메뉴 구성이다. 위 사진을 보면 서민 음식인 국밥을 파는 가게 메뉴판에 웬만한 고급 술집에서나 볼 수 있는 고가의 위스키가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도 가격이 무려 500,000~700,000만 원이나 되는. 지금껏 수많은 요식업소를 다녀봤지만, 이런 특이한 구성은 처음이었다. 주인에게 물어보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도 몹시 궁금하다. 아무리 비싼 음식을 시켜 봐야 40,000원 남짓한 국밥집에서 700,000원이나 되는 위스키를 주문하는 손님이 과연 있기나 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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