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내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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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 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고
맘 놓고 갈 만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정년퇴직을 하고 난 뒤 2년차를 맞이하고 있다.
난생처음 맞이하는 상황인지라 나 자신부터 궁금하기도 했고, 일부 염려도 없지 않았다.
가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불안감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초창기만 해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얼마간의 혼선이 있었지만,
경험들이 쌓이고 보니 이제는 새로운 형태의 삶에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편이다.
게다가 남은 생은 일보다는 자유로움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싶은 내 성향과도 잘 맞다.
퇴직 후 가장 큰 변화라고 하면 만나는 사람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줄어든 점이다.
현직 때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나야 할 상대가 많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누구를 만나고 말고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과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어느 유명 연예인이 가볍지 않은 신병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그 동안 알았던 주변을 대폭 정리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방송을 통해 들은 바 있다.
이유인즉, 본인의 형편이 괜찮았을 때는 더없이 가깝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처하고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는 이들이 있는 반면,
평소에는 데면데면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들이
도리어 생각지도 못한 관심과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뻗쳐 오는 걸 보면서
본인의 인간관계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문득 그 연예인의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나에게도 한때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로부터 절박한 구원의 손길을 요청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만큼 능력이나 여건 면에서 충분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외면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기꺼이 손을 뻗어 주었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난감했던 고비를 넘기고 그런 대로 평탄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후, 그들은 나와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지금껏 뭐라고 말 한 마디 없었다.
오히려 얼마 전 가족과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내 앞에서 자랑하기에 바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과거를 잊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기대할 수 있을까?
비록 나의 행위에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상황에 따른 서로 다른 처신을 보며 느끼는 인간적인 서운함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 번도 그들에게 나의 속내를 내비친 적은 없었다.
이처럼 인간관계는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고 해서,
자주 만난다고만 해서 그에 비례하여 꼭 '내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거기에는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각자가 가진 삶의
철학이나 가치관, 인생관의 교집합이 얼마나 되느냐가 더 중요한 변수인 것을.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
그 중 진정한 '내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느냐가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도.
결국 같이 갈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긴 인생길을
걷는 가운데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갈리게 된다.
굳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럴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란 시를 종종 읊어 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