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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모레 OO'

자유인。 2024. 8. 14. 04:44

 

 

 

자동차 소모품 교체를 위해 공업사에 들렀다. 현직을 떠나고 나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장거리 운전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아 어쩌다 한 번씩 들르게 된다.

이곳저곳 다니기보다는 집에서 가까운 한 곳을 '주치의'로 정해 정기적으로

차의 건강 상태를 맡기고 있는데, 이력까지 다 꿰고 있다 보니 관리적인 측면에서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점검을 하는 동안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공업사 사장이 들어왔다.

실무는 직원들에게 맡기고, 그는 주로 입구에서 방문하는 손님들의 안내를 맡고 있다.

둘이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그의 지난 과거사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지방에서 공고를 졸업한 후 처음 직장은 모 자동차 회사 서비스센터였다고 한다.

이후 독립해서 현재의 공업사를 차리게 되었는데, 얼마간은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순간의 잘못된 투자로 그동안 번 돈을 날리는 데는 채 2~3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어쩌고저쩌고 ...

 

대화 도중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내일모레 OO'이라고 했다. 개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의 나이는 대충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편이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까지는 보이지 않아 실제 나이를 물어보니 나와 동년배였다.

 

'OO'까지 가려면 아직 6~7년이나 남았는데 '내일모레 OO'이라니.

그 순간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이들(그중에서도 특히 남자들)이 본인의 나이를

실제보다 한껏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쉰 초중반임에도

'내일모레 회갑'이라거나, 예순이나 일흔 초중반임에도 '내일모레 일흔',

혹은 '여든'이라고 하는 식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처럼 숫자 개념이 정확하지 않았다.

너무 똑 부러지면 서로 간에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덤의 문화가

형성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예들 들어 과일 가게에 사과를 사러 갔는데

주인이 몇 개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두세 개', 혹은 '서너 개'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 말을 들은 주인 역시 구체적인 숫자를 되묻기보다는 나름대로 판단해

몇 개를 알아서 건네면 손님 또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 공간에 '왜 '끌고 간다'라고 할까?(2024. 3. 22)'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 자동차를 '몰고 간다'라고 해야 할 텐데,

왜 많은 이들이 '끌고 간다'라고 할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당시 어느 블친님께서 이는 바로 '언어의 보수성'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을

댓글로 달아주신 적이 있었다. 일례로 우리가 쓰고 있는 기차라고 하는 단어도

실제는 증기기관차 시대에나 쓰던 말인데, 동력의 전달 수단이 다른 것으로

대체된 오늘날에까지 지난날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성세대에서 주로 쓰고 있는 '내일모레 OO'이란 말 역시 세월이

변해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우리만의 오랜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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