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과유불급(過猶不及) 본문
'하루에 한 가지씩 무슨 글이든 써라.
글쓰기 능력은 천부적인 자질보다 연습량에 비례한다'
- 김용섭의 <페이퍼 파워> 중에서 -
요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은행에 갈 일이 거의 없다.
웬만한 업무는 모바일로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정리를 해야 했던 종이 통장도 더 이상 쓸 일이 없어졌다.
어느 날 거래은행 앱을 살피다 보니 휴면계좌가 있다고 했다.
잔액도 얼마가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런 계좌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뜻밖이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붕어빵 한 봉지는 사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누가 일부러 얘기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사항인데
이제는 친절하게도 앱에서 자동으로 안내해 준다. 모바일에서는 이체가 안 되니
창구에 직접 와서 처리해야 한다기에 오랜만에 은행에 들렀다.
아 ~ 그런데 웬일 ~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 곳곳에 종이 통장을 들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디지털로 이동하면서 은행 창구도 근무 인원을 줄이고 대폭 축소되었는데,
여기만은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자니(나는 어딜 가든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걸 싫어한다)
초면인 청원경찰이 옆으로 다가서며 이런 저런 얘길 건넨다.
장단을 좀 맞춰줬더니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다 해 준다. 갑자기 어리둥절하다.
손님 응대를 하다가도 시간이 비면 옆으로 와서 이 얘기, 저 얘기,
또 다른 손님이 오면 갔다가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이 얘기 저얘기.
급기야 내가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직원들 신상까지 쏟아져 나온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 사이 보이지 않는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마침내 발견하고는
'어디 가셨나 궁금했는데 거기 잘 계시네?' 라는 표정으로 멀리서 손짓을 보낸다.
얼마 이따가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 옆으로 애써 찾아와서는 또 말을 건넨다.
'다른 고객님들은 하나같이 조바심에 어쩔 줄을 모르는데
고객님은 여유롭게 책을 보며 기다리시는 걸 보니 지성미가 넘치신다'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번호표 순서 잊지 말고 건너뛰는 일 없으시기를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2시간의 기다림 끝에 겨우 업무를 다 마치고 나오자니 또 어느 틈엔가 번개처럼 따라붙는다.
'업무 잘 보셨느냐'고. '다음에 오시면 아는 체 좀 해 달라'고.
헐 ~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설령 다음에 만난들 나를 알아나 볼까?
은행 업무는 죄다 모바일로 처리하는 난데 언제 또 창구에 들를 일이나 있을까?
그는 이 땅에 태어나 수십 년째 은행을 드나들었음에도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던 나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표한 두 번째 인물이었다.
의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나를 왜 그리도 살뜰히 챙기려 했는지를.
관심은 고맙지만 1절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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