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군인 시절의 추억을 더듬다 본문
우리는 살면서 '언제 한 번'을 습관처럼 되뇌곤 하지만, 무엇이든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그 '언제 한 번'은 평생 가야 만나지 못하는
공수표로 머물 때가 많다.
어느 날 문득 잊고 살았던 내 삶의 지나온 흔적들을 더듬고 싶어졌다.
그중 하나가 고등학교 시절 거처였던 어느 도시의 자취방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아스라한 옛 기억을 더듬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몇 년 전 고스란히
남아 있던 옛 시절의 흔적을 확인하고는 얼마나 감개무량했는지 모른다.
또 다른 하나는 군인 시절의 흔적을 더듬는 일이었다.
워낙 고생스러웠던 까닭에 군문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이 더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실제로 전역한 뒤로는 부대 근처조차 얼씬거린 적이 없었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는 서울과 인접한 수도권 모처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바로 인근에는 한국항공대학교가 있었다(밴드 송골매의 리더였던
배O수 씨가 나온). 부대 앞에는 기차역이 있었지만, 보병 부대였던 까닭에
기차를 탄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시간이 한가로운 날
그 시절의 현장을 직접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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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한국항공대역. 그때도 역은 있었지만, 훈련차 그 앞만 수없이 오갔을 뿐 단 한 번도 역사 안에 들어간 본 적은 없었다. 복무 기간 중 대중교통을 이용한 건 정기휴가 때면 부대 앞에서 서울역까지 오가는 15x번 버스뿐이었다. 휴가 나온 동료 군인들끼리 단체로 서울역에 내려 꿈에서나 그리던 민간인 세계의 짜장면을 게눈 감추듯 먹고는 황홀해하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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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항공대역의 이름은 화전역이었다. 철로도 지금과 같은 전철이 아닌 일반 철길이었다. 한동안 한국항공대역/화전역을 병기하다가 지난해부터 한국항공대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홍보 효과 때문인지 근처에 대학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학교 이름으로 바꾸는 추세인데, 여기도 예외가 아니었던가 보다. 3년 가까이나 근무한 동네였지만, 이 역을 내 발로 직접 밟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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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만 그리면 지난 기억들이 꽤 선명한 듯하지만, 현장을 직접 가보면 긴가민가할 때가 많다. 몇 년 전 고등학교 시절의 자취방을 졸업 후 처음으로 찾았을 때도 같은 골목 주변을 얼마나 돌고 돌았는지 모른다. 이 지하차도 또한 오랜만에 오니 처음인 듯 낯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시 한강변으로 야간 매복을 나갈 때면 수시로 오가곤 했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붕만 새롭게 더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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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하긴 하지만, 부대 앞 도로 풍경이 예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부대가 속한 지자체는 인구 백만이 훨씬 넘는 대도시임에도 이렇게 낙후된 지역이 존재하는 건 오랫동안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던 곳이라 개발에 적잖은 제한이 있었던 영향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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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일이지만, 옛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모양이다. 가물거리는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고 맞추어 마침내 다다른 골목. 바로 내가 근무했던 부대 입구였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오직 명령에만 죽고 사는 생활이 너무나 고달파 저 문을 자유롭게 나설 날이 언제일까 얼마나 세고 또 세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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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을 싸고 있는 담장 역시 옛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우리 부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출 외박이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속 부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던 나는 '네가 없으면 훈련에 지장이 많다'라는 이유로 남들은 입대 후 6개월이면 나가는 첫 휴가를 무려 13개월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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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있어야 할 위병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웬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느낌이 이상했다. 군인인 듯싶은 지나는 이에게 물어보았다. 예전에 여기 근무했던 사람인데, 전에 있던 부대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알고 보니 2년 전에 다른 부대와 통합이 되면서 없어지고, 그 자리에 지금의 아파트가 들어섰다고 한다. 국가적인 인구 급감의 여파가 군대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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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인간이 옛 추억을 온전히 회상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내가 알던 누군가 지금껏 살아 있거나, 아니면 내가 지낼 당시의 풍경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그중 어느 한 가지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애써 방문해 본들 상실감만 커질 뿐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오매불망 그리던 실향민들이 세월이 흘러 어렵사리 고향을 찾았건만, 옛 자취는 온데간데없고 낯선 풍경만 눈에 보일 때의 심경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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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무할 당시의 병장 월급은 4,500원. 지금은 125만 원이니 그 사이 무려 280배 가까이나 올랐다. 근무 환경 역시 그때와 비교하면 말할 수 없이 좋아져, 지금은 인격 존중 차원을 넘어 아예 '모시고' 산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가 되었다. 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야만 하는 군대였지만, 그 시간을 통해 약하기만 했던 나의 몸은 더없이 건강해졌다. 나 스스로 불만이었던 정신 또한 그 과정을 통해 한결 개선되었다. 늘 그렇듯 인생은 무엇이 되었건 어느 한쪽 면만 존재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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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지만,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어 부푼 가슴으로 찾은 옛 부대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젊은 날 한때나마 나의 청춘을 불살랐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일이다. 지금의 삶이 아무리 편하고 만족스러울지라도, 세월이 지나 돌아보면 풍족해서 좋았던 기억보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을 더 아름답게 되새김하는 건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된 심리일지 모른다(물론 안 해도 될 고생을 일부러 사서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쩌면 남자들에게 있어 군인 시절은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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