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빠르고 편리한 것만이 능사일까? 본문
오늘날의 세상은 속도가 최우선적인 화두가 되고 있다. 더 빨라야 남을 앞설 수 있고, 그러자면 부하負荷나 장애물을 최소화해야 한다. 속도를 저해하는 모든 요소는 제거하고 타파해야 할 대상이 된다. 급기야 전통이란 이름으로 계승 발전되어 오던 많은 것들이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웃 간의 교류도 없어지고, 오로지 나와 내 가족만이 전부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처음부터 지금의 환경에서 나고 자란 세대야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게 으레 그런 것인 줄 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아날로그 문화 속에서 지내다가 뒤늦게 생각지도 못한 디지털 세상을 접한 세대는 갑자기 밀어닥친 시대 변화가 적잖이 당황스럽다. 세상은 편리함이 다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여 보지만, 듣는 상대방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결국 세대 간 단절의 벽은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예외적으로 그들만의 전통을 이어가는 사례가 있다. 우리 집안 얘기다. 일찍이 나의 조부는 6형제분이셨다. 당사자들이야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나셨고, 그분들의 2세 역시 아무도 남아 계시지 않지만, 살아생전 또 다른 당신들의 후세대를 위해 무척이나 의미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떠나셨다.
바로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저마다의 산소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이른바 납골묘라고 하는 것인데, 요즘의 아파트 문화와 비슷한 개념이다. 외관상으로 봉분의 형태는 유지하면서 그 아래에는 개별 유골함을 안치하여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나의 부모님 세대부터, 나와 내 자식 세대까지 3대가 대상이다.
누구보다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고 유교 사상에 투철하셨던 분들이 이처럼 시대를 앞선 획기적인 발상을 과감히 실행에 옮기셨다는 자체가 나로서는 적잖이 놀라운 '사건'이었다. 납골묘를 조성한 이래 매년 10월이 되면 온 집안이 다 같이 모여 합동 성묘를 하고 있다. 조부 세대의 3세들로 현재 만나는 어른들끼리는 육촌지간이 된다. 그 아래 세대가 결혼을 하고 또 다른 2세들까지 태어났으니 모두 합치면 십촌지간이 모이는 셈이다.
과연 요즘의 디지털 세대가 이런 데 관심이나 있을까 싶지만, 해마다 참석 인원은 그들을 포함하여 쉰 명을 넘나들 만큼 일반적인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크고 작은 문제점들은 어른들의 토의 과정을 거치며 시대상을 반영한 보다 현실적인 개선책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나가고 있다.
주된 명분은 조상들에 대한 예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취지는 우리만의 전통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가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함께하는 구성원 모두는 다 같은 뿌리를 지닌 한 자손임을 잊지 말자는 것, 아무리 시대가 변한들 빠르고 편리한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몸소 일깨워 주자는 것이다.
비록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행사지만, 10월 합동 성묘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확인하는 우리 집안만의 아름다운 상견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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