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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도 시간은 필요하지

자유인。 2024. 12. 17. 05:23

 

 

오래전 가수 김국환이 부른 노래 중에 '우리도 접시를 깨뜨리자'라는 곡이 있었다. 아내가 하는 일을 이따금씩 남편이 대신해 주자는 내용이 담긴 노래였다. ~ 자 그녀에게 시간을 주자 ~ 저야 놀든 쉬든 ~ 잠자든 상관 말고 ~ 거울 볼 시간 시간을 주자 ~ 그녀에게도 시간은 필요하지 ~ (중략)

 

한때 우리 사회에는 남녀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던 시절이 있었다. 돌아가신 선친은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 지난봄에 떠난 장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밥과 설거지와 집안 살림은 오롯이 어머니와 장모의 몫이었다. 남자들이 '감히' 금남의 영역에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 그런 일이 있다간 뭐가 떨어진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부인이 어디 외출을 했다가도 끼니 때가 되면 남편의 밥을 해결하기 위해 때맞춰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 생각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아내와 함께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였다. 어쩌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를 본 어머니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표정 하나만으로 그녀의 속내를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런 사고는 비단 부모 세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남녀가 유별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자식 세대에까지 이어졌다. 오래전 동창회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기생 중 한 명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마누라가 밥을 차려주지 않으면 절대로 안 먹는다'는 걸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의 얘길 들으면서 인간의 사고는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이웃들과 며칠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녀가 없는 사이 며느리와 통화할 일이 있었다. '어머님 안 계신데 식사를 어떻게 하시느냐'고.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아버지의 밥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너의 시어머니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알아서 잘 차려 먹는다'고 했다.

 

사실이었다. 나는 지금껏 나의 밥을 이유로 아내의 외출을 막은 적이 없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 못했던 결혼 초창기만 하더라도 아내가 약속이 있어 외출할 때면 늘 나의 밥을 걱정했다. 성장기에 보고 자란 자신의 부모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다 알아서 차려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놀다 오라'고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으레 그런 줄 알고 남편의 밥에 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나의 태도는 부부간에도 서로의 영역이나 사생활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부부라고 해서 반드시 모든 걸 알아야 하고, 모든 걸 공유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함께할 때는 함께하지만,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때는 또 그것을 존중해 줄 때 부부 관계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내 역시 이제껏 나의 외출을 그녀의 생각만으로 제한한 적이 없다.

 

부부간의 적지 않은 갈등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일방의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구속하려 드는 데서 발생한다. 부부라고 해서 생각이 다 같을 수가 있을까. 아니, 꼭 그래야만 할까.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사고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다면, 옷차림은 양복인데 신발은 짚신을 신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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