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그곳에 가면 - 관악산에 오르다 본문
오랜만에 관악산을 찾았다. 이렇게 고산高山을 오른 지가 몇 년 만인지 모른다. 한때는 사흘이 멀다 하고 전국의 산천을 누비던 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높은 산에 대한 의지가 갑자기 꺾였다. 특별히 건강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딱히 이유도 없이 그냥 싫어졌다. 그래서 한동안은 산을 가봐야 동네 뒷산으로 가볍게 산책이나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관악산을 한 번 다녀와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관악산은 해발 632미터로 서울과 과천, 안양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름 그대로 나무보다는 바위가 많은 악산이다. 정상적인 발걸음이면 왕복 4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하산길이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다. 갈림길에서 조금만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극과 극을 향하게 된다. 관악산에 갈 때마다 그러는 편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상적으로 등산 시간에 비해 하산 시간은 길어야 3분의 2 정도면 충분한데, 얼마나 길을 헤맸는지 오르내리는 시간이 거의 비슷했다. 갈림길은 많은데 이정표가 상대적으로 부실한 것도 일부 원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도중 어디로 갈지를 몰라 방향을 묻는 이들이 꽤 있는 걸 보면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이에 대한 대대적인 보완과 정비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하단부에는 그런대로 가을의 표정이 남아 있었지만, 중반부 이후부터는 겨울을 앞둔 모습이 역력했다. 한때는 무성했다가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땅에 떨어져 뒹굴고 마는 나뭇잎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네 삶도 어쩌면 이와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방송에서 어디선가 이상 기온으로 때아닌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었다. 설마 했었다. 자연이 아무리 정신을 못 차려도 그렇지, 겨울이 코앞인 11월에 무슨 꽃이냐고. 하지만 방송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오르면서 한 번, 내려오면서 또 한 번 각기 다른 곳에서 봄인 듯 꽃을 피운 나무들을 만났다.
우리나라 형편이 나아졌다는 건 산에 올라보면 금세 알 수 있다. 휴식을 취하면서 풍경도 조망할 수 있는 편의시설을 곳곳에 잘 만들어 놓았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땅에서는 결코 볼 수가 없고 높은 산에 올라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산을 오르는 재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어느 스님이 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흔히 책은 '제목 장사'라는 말이 있을 만큼 책의 제목을 정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 출판계에서 중시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그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을 너무나도 잘 지었다는 생각을 나대로 하기도 했었다.
그 책의 제목을 잠시 빌려서 응용한다면, 세상의 풍경 역시 '나서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음악을 하는 사람도, 사진을 하는 사람도 길을 나서지 않고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면 살아 있는 소재를 접할 수가 없다. 그들이 세상을 자주 주유周遊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악산 정상에 자리한 연주대戀主臺. 내가 관악산을 오르는 주된 이유는 이 연주대를 만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관악산의 최고 백미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다른 어떤 산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의 아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막내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후 이곳에 머물면서 주군主君이 있는 궁궐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옛사람들의 작명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연주대 풍경의 절정은 단풍이 물들 무렵인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만 때를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