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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관한 추억

자유인。 2024. 10. 25. 03:49

 

 

모처럼 영화를 한편 보고 왔다. IM HERO THE STADIUM. 지난 5월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가수 임영웅의 공연 실황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본래는 생각이 없었는데 이웃님 블로그를 보다가 갑자기 마음이 동했다. 나는 영화를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썩 좋아하지도 않는다. 영화관에는 잘 가야 일 년에 한두 번? 세간에 화제가 될 만한 영화가 있으면 어쩌다 보는 정도이다. 좋아하는 장르를 굳이 꼽자면 액션물, 거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음악이 있는 영화이다. 평소의 내 모습과는 달리 영상물에 관한 한 많은 생각을 요하는 작품은 눈길이 잘 가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 영화는 흐름 전개가 너무 빨라 좇아가기가 벅차다.

 

영화에 관한 나의 기억은 대부분 잠과 연결되어 있다. 중학교 때 형을 따라 종종 영화관엘 가곤 했지만, 그때마다 졸거나 잤던 기억밖에 없다. <십계>를 비롯하여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당시 유행하던 영화들을 더러 보기는 했어도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제대로 집중해서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십계>에서는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는 장면, <벤허>에서는 아슬아슬한 전차 경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주인공인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가 석양이 지는 나무 아래서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 등이 내가 기억하는 전부이다.

 

군인 시절에도 부대에서 이따금씩 연병장에 병사들을 모아놓고 영화를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때 역시 취침 시간으로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다른 동료들은 영화를 보여준다고 하면 다들 한껏 들뜨곤 했지만, 나는 그저 '선임들 눈치 보지 않고 잠시나마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내와도 가끔씩 영화관을 찾긴 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다. 드물게 자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변호인>이란 영화였다. 얼마나 몰입도가 높았던지 검찰 수사관 역을 맡은 어느 배우가 시위 대학생을 모질게 몰아붙이는 장면을 보면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하마터면 영화관이란 사실도 잊고서 소리를 지를 뻔했었다.

 

선친께서는 영화를 참 좋아하셨다. 공무원이셨던 당신은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후 인근에서 가장 먼저 텔레비전을 구입하셨다. 날마다 저녁이면 우리 집 마당은 웬만한 극장을 방불케할 만큼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몰려든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당시 주말이면 '명화극장'이란 이름 아래 외국 영화들을 정기적으로 방영해 주곤 했었는데, 당신께서는 밤늦도록 그것들을 다 보신 후 잠자리에 드시곤 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성장기를 겪으셨던 까닭에 한평생 절약이 미덕이란 신념으로 살아온 분이었음에도 예외적으로 '사치'를 하실 때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책과 영화였다.

 

어느 날인가는 퇴근 후 저녁을 드시자마자 어디론가 부리나케 자전거를 타고 나가시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다룬 <도라 도라 도라>란 영화를 읍내 영화관에서 혼자서 보고 오신 거였다. 그 정도로 영화에 관한 한 진심이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텔레비전을 일찍 구입하셨던 것도 어쩌면 당신이 좋아하시는 영화를 좀 더 편하게 보시기 위한 목적이 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영화와 더불어 '문학청년'이라 불릴 만큼 책을 좋아하셨지만, 가장으로서 자식들만은 당신처럼 배곯게 하지 않겠다는 강한 책임감 때문에 제대로 뜻을 한번 펼쳐 보지도 못하고 떠나셨다. 살다 보면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이 있어도 그 길을 가지 못하고 본인의 적성과는 맞지도 않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평생토록 농사를 지으셨지만 농사보다는 학문의 길로 가셨더라면 훨씬 더 잘 어울리셨을 분이었다. 가신 지 여덟 해.. 자식들 중 내가 당신과 여러 면에서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살아계실 때 자식으로서 좀 더 살뜰히 헤아려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죄송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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