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친손주와 외손주 본문
내 연배쯤 되면 손주라는 단어가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사위나 며느리를 볼 나이가 되었고, 그러면 손주들이 태어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본래 손주라는 말은 손자의 비표준어였다. 그러던 것이 2011년 8월 국립국어원에서 손자와는 뜻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표준어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손주라는 단어는 손자와 손녀를 동시에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나 또한 굳이 손자나 손녀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손주라는 표현을 쓸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이 다녀갔다. 애초에는 송년회를 겸해 남매 가족이 다 모이기로 했었는데, 딸이 갑자기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아들 가족만 오게 되었다. 돌이 갓 지난 친손주는 갈수록 재롱이 늘어만 간다. 하루가 다르게 나타나는 녀석의 소소한 변화들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의 무장을 해제시킨다.
얼마 전 만난 친구가 물었다. 친손주와 외손주 중 누가 더 예쁘냐고. 대개 누가 무슨 질문을 하게 되면 평소 본인이 갖고 있던 생각을 상대방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을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나처럼 일찌감치 자식들을 다 출가시켰고, 외손주가 셋에, 친손주가 하나인 손주 부자가 되었다. 외손주를 더 오랫동안 봐 왔지만, 친손주를 보고 나니 확실히 느낌이 다르단다. 아무래도 외손주는 '남의 집' 자손이고, 자신의 핏줄인 친손주에게 더 마음이 가더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여태 한 번도 친손주와 외손주를 구분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친손주는 친손주대로, 외손주는 외손주대로 다 예쁘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친구의 생각은 내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었다.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의 세태는 어떤가. 처가는 가까워지고, 본가는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 남편보다는 아내의 발언권이 훨씬 더 세졌기 때문이다. 옛 어른들이 보면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집집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엄연한 현실이다.
남아 선호사상이 극심했던 시절에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며느리에게 어떻게든 아들을 낳으라고 강요하다시피했다. 이미 딸이 넷, 다섯이나 되는데도 출가외인이라며 기어이 아들을 강조했다. 여자의 잘못이 아님에도 딸만 낳은 며느리는 평생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주변에 보면 대체로 딸 많은 집안 형제들은 우애가 좋지만, 아들 많은 집안치고 우애 좋은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형제들끼리는 그렇지 않더라도, 배우자들로 인한 갈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외손주보다는 친손주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는 친구 역시 어쩌면 자신의 부모 세대에게서 학습된 지난날의 사고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느 집보다 유교사상이 투철했던 부모 밑에서 성장한 나로서도 당신들이 계실 때는 그분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와는 시대적 환경이 판이하게 달라진 오늘날에까지 그 시절의 생각을 고집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적 잣대로만 재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각자의 생각이자 판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아들, 딸을 인위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현실에서 딸만 가진 부모들은 여전히 과거처럼 '아들 없는 설움'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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