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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손전화가 등장한 이래 대부분의 현대인은 사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맺게 되었다.사진을 업으로 살아가는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 누구나 부담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때로는 삶의 기록을 위해서, 때로는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라는 걸 세상에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 때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자신만의 '작품'을 남길 심산으로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댄다. 환경 또한 과거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사진관에서 필름을 인화하기 전까지 자신이 찍은 사진의 상태를 알 수가 없었다.24판, 또는 36판짜리 필름을 어떻게든 다 찍고 나야 결과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도중에 실수로 필름 뚜껑을 잘못 열어 애써 찍은 사진을 못 쓰게 된 ..

나는 형제가 모두 4남매다.그들 모두 고등학교 과정까지 시골에서 마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그때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어느 날 하나둘씩 당신들의 품을 떠나도시로 향한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깊고 크셨을까 뒤늦게나마 되돌아보곤 한다.어렸기에 오로지 나 하나의 세상만 보일 뿐, 부모님은 어떻게든 알아서 살아가시겠지,라며 미처 거기까지 헤아릴 능력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시기였을 것이다.내가 이제 그분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던 당신들의 심경을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그 사이 내 아이들도 자라 각자의 가정을 꾸렸고,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어쩌다 만나 봐야 아들네 가족이나 딸네 가족 따로따로 만날 때가 더 많다. ..

사진을 찍으러 나갔던 아침에만 해도 떡집 앞 풍경이 이랬었다.예년에 보면 이런 줄은 오후가 되도록 줄어들 줄 몰랐다. 바람을 쐬러 나가는 길에 아내가 송편을 살 수 있으면 좀 사 오라고 했다.아침에 봤던 풍경이 떠올라 아마 불가능할 거라 말은 했지만,정 안 되면 말지라는 생각으로 일단 가보기는 하겠노라고 했다. 그때 시각이 오후 5시쯤.. 점심때까지만 해도 끝이 없었던 줄이 그 사이 거짓말처럼 다 사라지고 몇 명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거의 포기하다시피했던 송편을 여유롭게 구입할 수 있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인생은 마냥 서두른다고 능사가 아님을, 때로는 운도 작용하는 것임을, 어쩌면 타이밍의 싸움일지도 모른다는 교훈을 추석을 앞둔 떡집에서 배우게 된다. 자료를 살펴보면 '송편(松䭏)은..

해마다 추석 전날 아침이 되면 나는 동네 떡집으로 향한다.송편 구입을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선 이들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함이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줄은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줄어들 기미가 없다. 바야흐로 외주外注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치도, 반찬도, 송편도 더 이상 집에서 만들지 않는다.절차도 번거롭거니와 식구가 몇 안 되는 집에서는 만드는 비용이 오히려 사는 비용보다 더 든다.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모든 건 자가생산, 자가소비였다.아버지 없는 유복자로 태어나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던, 가장으로서 식구들 배곯지 않게 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과제이자 화두였던 선친은 시장에서 돈을 주고 먹거리를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낭비벽이 심해서 언제 기반을 잡을 수 있..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다.기차로, 버스로, 혹은 자동차로 고향을 찾는 이들을 보며 나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어느 시점까지만 해도 나 또한 그 대열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농촌이다(위 사진 - 실제로 최근 내 고향 마을 전경이다).고향을 떠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였다.이후 취업을 하고, 결혼한 뒤에도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면 빠짐없이 고향에 내려갔다.더러 가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른 때보다도 요즘 같은 명절이 특히 그랬다.제대로 도로망이 구축되지 않았던 때라 왕복 2차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주차장이 따로 없었다. 편도 1차로뿐이어서 길이 막혀도 중간에 달리 빠질 수가 없었다. 오늘날 2시간 남짓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