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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아름다운 세상
맏아들을 낳고 난 뒤 어머니는 신경통과 관절염에 시달리셨다. 하지만 하루하루 먹고살기에도 바빠 변변한 병원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셨다. 병이란 시기를 놓치고 나면 쉽게 나을 것도 영영 고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당신이 그러셨다. 검증되지도 않은 무허가 민간요법에만 반복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낫기는커녕 평생의 고질병이 되고 말았다. 그 몸으로 그 많은 농사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으니 얼마나 버거우셨을까. 무심한 남편이 알아줄까(그 시대 많은 아버지들이 그랬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어린 핏덩이들이 알까. 그렇게 당신은 홀로 고단하고 서러운 세월을 견디셨다. 내 고향집은 시내(우리는 '읍내'라 불렀다)에서 약 4킬로미터. 걸어갈 수는 있지만 적잖이 불편하다(초등학교 때까지 우리는 그 거리를 걸어서 ..
'국밥대통령' ..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곰탕 전문 음식점이다.현지에서 건설업에 종사하는 친구의 안내로 들렀다.생긴 지는 1년 남짓 된 듯한데, 꽤나 인상적인 곳이어서 소개한다. 점심과 저녁(10:00~20:00)에만 파는 한우소머리곰탕을 주문하면 고기와 국과 밥이 따로 나온다. 그런데 메뉴 이름이 걸작이다.하나는 '대통령'이요, 다른 하나는 '영부인'이다.'영부인'이 고기가 더 많고 비싸다. 세상에 이렇게도 이름을 짓는구나 싶어 보자마자 빵 터졌다.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어먹지 않을 것 같다.수육을 보면 술 한 잔이 절로 생각난다.무엇보다 맛있다(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또 다른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양이 적은 손님은 한 그릇을 시켜 둘이 나누어 먹어라'는 문구를 벽에까지 붙여놓..
부모님 다 떠나시고 나니 딱히 고향에 내려갈 일이 별로 없다.설령 가더라도 반기는 이 하나 없으니 허허로운 심경은 떠도는 길손이나 마찬가지다.그래도 내가 나고 자란 고향집 하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더없는 위안이 된다.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았다.내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우리 형제들 모두가 같은 집에서 나고 자랐고, 그들 역시 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선친은 유복자로 태어나셨다.당신이 세상의 빛을 보기 한 달 전, 조부께서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셨다.당장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말 못 할 고생이 이어졌다. 어렵사리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친 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푼돈이 모일 때마다 한 ..
오랜만에 지인의 사무실을 찾았다. 내가 퇴직을 하던 해 마지막으로 만났으니 실로 몇 년 만이다. 그럼에도 마치 어제 만난 듯 자연스럽다. 어쩌다 두 사람이 만나면 서너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집안 얘기부터 사는 얘기, 심지어 회사 얘기까지 온갖 주제를 망라한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서로 간에 구축된 남다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영어 속담은 적어도 그와 나 사이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와 나는 같은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났다. 나는 해외업무를 맡고 있었고, 그는 서비스 담당자였다. 얼마 후 그는 직장을 떠났고, 한동안 또 다른 조직에서 몸을 담고 있다가 그로부터 또 얼마의 시간이..
많은 이들이 본인이 살고 있는 동네나 나라는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외지나 외국만을 열심히 더듬는 경우가 많다. 그냥 살고 있을 뿐, 누군가 자신이 사는 동네나 나라에 관해 설명하라고 하면 마땅히 설명할 게 없다. 관심이 없으니 특별히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네 적지 않은 이웃들의 현실이다. 나라고 예외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시간이 자유로워진 요즘 평소 궁금하거나 못 가 본 장소를 뒤늦게 하나씩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차를 타고 경수산업도로를 숱하게 오가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 정상 부근 절인 듯 보이는 한 건물의 정체가 늘 궁금했다. 이따금씩 길가 계단 진입로를 통해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모습도 보였다.분명 길은 어디로든 나있는 것 같았고, 언제쯤 직..